숫자가 말해주는 한국 에너지 정책의 방향
최근 발표된 정부 업무보고를 보면, 한 가지 메시지가 유난히 또렷하게 드러난다.
“올해 원전 이용률을 89%까지 끌어올리겠다.”
이 문장은 단순한 목표 수치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에너지 정책이 처한 현실과 선택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동안 원전은 늘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안전성, 비용, 지역 갈등, 그리고 정치적 상징성까지. 그러나 이번 발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가치 판단이나 이념적 구호가 아니라, 숫자와 조건이다. 정부가 원전 이용률이라는 매우 기술적이고 실무적인 지표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정책 기조의 성격을 보여준다.
‘원전 확대’가 아니라 ‘원전 활용’이라는 표현의 의미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신규 건설’보다 **‘이용률’**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원전 이용률은 이미 존재하는 발전 설비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를 뜻한다. 즉, 새로운 원전을 당장 더 짓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가동 중인 원전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이 접근은 매우 현실적이다. 원전은 한 번 건설되면 수십 년간 사용하도록 설계된 설비다. 이미 건설 비용의 대부분을 회수한 상태라면, 가동을 멈추는 것이 오히려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일 수 있다. 정부가 원전 이용률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힌 배경에는 이러한 비용 구조와 설비 효율성이 깔려 있다.
왜 지금 ‘원전 이용률 89%’인가
원전 이용률 89%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수치다. 이는 최근 10여 년간 보기 어려웠던 높은 수준이며, 전력 수급 정책에서 상당히 공격적인 목표에 속한다. 그렇다면 왜 지금일까.
첫째, 전력 수요가 구조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 구조 변화, 데이터센터 확장, 전기차 보급, 전기 기반 난방 확산 등은 모두 전력 소비를 늘리는 요인이다. 문제는 이 수요가 단기적이 아니라 상시적이고 안정적인 공급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둘째, 재생에너지의 한계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는 반드시 확대되어야 할 방향이지만, 발전량의 변동성과 송전망 문제는 여전히 해결 과제다. 기사에서도 서해안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대규모 송전 인프라 계획이 언급되는데, 이는 재생에너지가 ‘발전’뿐 아니라 ‘전달’에서 막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수단으로 정부가 선택한 것이 바로 원전의 이용률 제고다.
전기요금, 그리고 원전이라는 선택지
기사에서 원전 이용률 상승의 효과로 강조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전기요금 부담 완화다.
전기요금은 단순한 에너지 가격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활과 산업 경쟁력에 직결되는 민감한 요소다.
원전은 연료비 비중이 낮고,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에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는다. 이미 설비가 구축된 상태라면, 추가 비용 없이 발전량을 늘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된다. 정부가 원전을 다시 꺼내든 이유는 결국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정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탈원전의 실패’인가, ‘정책의 조정’인가
일부에서는 이번 발표를 두고 ‘탈원전 정책의 후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기사 내용을 곱씹어 보면, 더 정확한 표현은 정책의 조정 혹은 현실화에 가깝다.
에너지 정책은 장기 계획과 단기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방향성은 유지하되, 그 속도가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완전히 배제하는 선택은 불가능해졌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정부가 원전을 다시 언급하면서도 여론조사, 정책토론회, 지역 의견 수렴을 강조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원전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전과 탄소중립, 모순일까 보완일까
흥미로운 점은 원전이 탄소중립 목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전은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국가들이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원전을 보조적·기저 전원으로 유지하고 있다.
기사에서 원전 이용률을 높이겠다는 발표와 동시에 재생에너지 확대 계획이 함께 언급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대립 구도로 보지 않고, 하나의 전력 시스템 안에서 역할을 분담시키려는 접근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숫자’가 말하는 정책의 진짜 의도
정책은 말보다 숫자에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원전 이용률 89%’라는 수치는 이념이나 구호가 아니라, 현재 전력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지를 보여준다.
새로운 원전을 짓는 데는 시간과 사회적 비용이 든다. 반면 기존 원전을 안전하게, 계획적으로 더 활용하는 것은 비교적 즉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정부가 선택한 해법은 화려하지 않지만, 매우 실무적이다.
마무리하며: 원전은 다시 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중요한 축이다
이번 기사를 통해 읽어야 할 핵심은 단순히 “원전으로 회귀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정책과 담론의 중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원전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원전을 완전히 배제한 채로는 현재의 에너지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책적으로 인정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는 방향 전환이라기보다, 상황 인식의 변화에 가깝다.
그동안 원전은 찬반의 논리 속에서 늘 극단적인 선택지로 다뤄져 왔다. 한쪽에서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핵심 전원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가능한 한 빠르게 줄여야 할 대상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전력 시스템은 이러한 이분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력은 끊기지 않아야 하고, 요금은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하며, 동시에 탄소 배출이라는 국제적 과제도 외면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원전은 다시 논의의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앞으로도 원전은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안전성, 지역 수용성, 장기 폐기물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규 건설이나 수명 연장과 같은 사안은 사회적 합의 없이는 추진되기 어렵다. 기사에서 여론조사와 정책토론회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원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사회가 감당해야 할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점에서 분명해진 사실 하나는 있다.
원전은 전력 수급 안정, 전기요금 관리, 탄소중립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고려할 때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선택지로 다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다. 이는 원전이 다시 ‘중심’이 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원전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라는 주장도 아니고, 재생에너지 확대를 포기하겠다는 신호도 아니다. 다만, 재생에너지가 아직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을 메우는 현실적인 축으로서 원전의 역할을 다시 인정했다는 의미에 가깝다.
원전 이용률 89%라는 숫자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이 수치는 단순히 발전소를 더 오래, 더 많이 돌리겠다는 기술적 목표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이미 존재하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단기적인 전력 불안을 최소화하고, 급격한 요금 인상을 피하며, 동시에 탄소 배출을 억제하려는 복합적인 계산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숫자는 정책의 의지를 드러내는 구호라기보다, 현실 조건 속에서 도출된 타협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숫자는 한국 에너지 정책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상적인 미래 그림보다는, 당장 작동해야 하는 구조를 먼저 점검하겠다는 태도다.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목표를 유지하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백과 리스크를 관리하는 수단으로 원전을 활용하겠다는 접근이다. 이는 단기 성과를 위한 임시 처방이 아니라, 전력 시스템 전반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에 가깝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력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재생에너지 확대에 필요한 송전망과 저장 기술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원전은 당분간 중요한 축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역할은 과거처럼 절대적인 중심이 아니라, 다른 전원들과 함께 균형을 이루는 하나의 축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번 기사에서 읽히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원전은 다시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만능 해법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선택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책은 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이며, 이번 원전 이용률 상향 조정은 그 균형점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에 가깝다. 앞으로 이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국 에너지 정책이 구호보다 구조를, 선언보다 작동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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